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의 간증을 보면, 공통적으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해도 ‘거듭남의 회심’ 순간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의 중요성을 말하는 구원파의 메시지를 구원파 비방에 한결같이 앞장서온 정동섭 소장은 이렇게 왜곡하고 있다.

“구원을 확증하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고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물건처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다. ..”

그러나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나누어준다는 것인지, 이에 대한 정동섭 소장의 구체적인 설명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구원파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집단이라는 결론을 내세우기 위해 근거 없는 비방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최삼경 목사도 “심지어 몇 년, 몇 월, 몇 시, 몇 분에 구원받았냐고 다그치는 것이 상례이다.” 라고 구원파를 비방하는데, 구원파에서는 구원의 확증을 나누어주는 일도 구원날짜를 다그치는 일도 없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오히려 구원날짜를 다그친다고 구원파를 비방하는 정동섭 소장은 그의 간증에서 특정 장소, 특정일에 예수님 앞에 회개하고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한 날이 있다고 공언하고 있다.

“나는 구원파에서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는지 지적으로 깨달은 적은 있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앞에 회개하고 그를 마음에 영접한 것은 1980년 8월 15일, 사랑의 교회 수련회가 열렸던 충현교회 기도원에서였다. 이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증인이시고 나의 양심이 이를 증거한다.” [정동섭 / 이영애, <구원파를 왜 이단이라 하는가?>, 죠이선교회, p. 93]

사울이 앞장서서 예루살렘 교회를 크게 핍박하던 때의 일이다.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빌립은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 길을 가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병거를 탄 채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을 안 빌립은 간다게가 읽고 있는 이사야의 성경 구절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예수님을 가르쳤고, 간다게는 빌립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 바로 세례를 받았다(행 8장).

간다게가 복음을 받아들인 날짜와 시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가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분명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믿음을 쌓아간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변화된 것이다. 바울이 유럽의 첫 전도지역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도 어느 안식일 날에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 루디아가 복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행 16장). 날짜와 시간이 숫자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루디아 또한 복음을 받아들인 날이 있다. 다음 성경구절을 보더라도 개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구원받는 날이 있으며 거듭남은 단번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골 1:6).
-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 1:3)

복음을 안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에도 믿은 날을 언급한 가사가 여러 군데 있다.

-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찬송가 138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
-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찬송가 209장 ‘주의 말씀 받은 그날’)

복음을 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그리스도인들의 간증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죄 사함의 은혜를 얻은 날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여러 사람들의 자서전, 일기, 전기에서 복음을 안 시점의 기록을 뽑아 보면 다음과 같다.

어거스틴
“나는 죄악으로 인해 아직도 꽉 묶여 있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당신에게 부르짖기를 ‘언제까지입니까? 언제까지입니까? 내일입니까? 내일입니까? 왜 지금은 아닙니까? 왜 이 순간에 나의 불결함이 끝나지 않습니까?’ 라고 한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내가 지은 죄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통회하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말소리가 소년의 것인지 소녀의 것인지 나는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계속 노래로 반복되었던 말은 ‘들고 읽으라, 들고 읽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나는 그 책을 집어 들자마자 펴서 내 첫눈에 들어 온 구절을 읽었습니다. 그 구절의 내용은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읽고 싶지도 않고 또한 더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구절을 읽은 후 즉시 확실성의 빛이 내 마음에 들어와 의심의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었습니다.”[어거스틴,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대한기독교서회, p.263~264]

존 웨슬리
“1738년 5월 24일 수 (전략) 저녁에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은 채 올더스케이트 가에 있는 어느 회에 갔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 전쯤 되어서 그가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신다고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믿는다고 나는 느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씻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존 웨슬리, <존 웨슬리의 일기>,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p.69-70]

찰스 웨슬리
“(1738년) 5월 21일은 영국 국교회의 오순절 주일이었다. 그 날은 또한 차알스 웨슬리의 회심일이기도 한다. 그는 ‘나는 그가 나에게 임하시리라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라고 기술하였다. (중략) 그 날 브래이는 그에게 시편 32편의 ‘허물의 사함을 얻는 자는 복이 있도다’ 는 말씀을 읽어 주었다. 비록 그는 처음에는 ‘나는 격렬한 반감을 느꼈고 믿기를 주저하였다.’ 라고 말하였지만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영은 여전히 나의 악한 영과 싸우셨고 마침내 그는 조금씩 나의 불신앙의 어두움을 몰아내셨다. 나는 마침내 확신에 이른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는 어떻게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를 몰랐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엎드려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아놀드 델리모어, <차알스 웨슬리의 생애>, 성서연구사, p.71~72]

존 뉴톤
“신약을 통독하면서 나는 몇몇 구절들로 인해 충격을 받았소. (중략) 특히 탕자의 비유(눅 15장) 이야기들이었소. 그 탕자가 너무나도 나 자신을 예시해 준다고 나는 생각했소. 아니, 그보다도 탕자를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선하심, 그와 같은 아들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 모습은, 죄인들을 돌이키시는 주님의 선하심의 충분한 설명이 되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소. 나는 계속하여 많은 기도를 드렸소. 주님께서 중재하셔서 나를 구원하시기에 이르렀고, 나는 그가 그보다 더한 것을 해주기를 희망했소. (중략) 우리가 아일랜드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내 자신의 마음속에, 복음의 진리와 내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는 복음의 정확한 적합성에 관하여 만족할 만한 증거를 얻었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고난을 통해 죄를 용서하심에 있어서 그는 자기의 자비뿐만 아니라 자기의 공의까지 선포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소. 그쯤 가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려고 육체로 나타나셨다’는 지고한 원리를 나는 즐거이 받아들였소.”[존 뉴톤, 존 뉴톤의 자서전, 생명의 말씀사, p.90~91]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그날(1849년 12월) 아침 오지 않으셨습니다. 내 생각에 눈 때문에 길이 막혔던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매우 말라 보이는 한 남자가 설교를 하려고 단 위에 섰습니다. 설교자들은 당연히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지만 이 사람은 정말 어리숙해 보였습니다. (중략) 그는 액센트를 주며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중략). 단지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성경은 나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여, 당신은 매우 비참해 보이는군요.’ (중략) 그는 외쳤습니다. ‘젊은이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당신이 할 일은 바라보며 사는 것뿐입니다!’ 나는 즉시 구원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가 말하는 다른 것들은 알지 못했지만 하나의 생각이 온통 나를 감쌌습니다. 나는 수십 가지 일을 하기를 기다려왔지만 ‘바라보라’는 그 단어를 들었을 때 얼마나 감미로운지. 오! 나는 나의 눈이 빠져나갈 정도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구름은 걷히었습니다. 어둠은 물러가고 나는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일어서서 그들 중 가장 열성적인 이들과도 같이, 그리스도의 소중한 피와 그만을 바라보라는 간단한 진리를 찬송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아놀드 델리모어, <찰스 스펄전>, 두란노, p.35~37]

찰스 피니
“이른 아침에 사무실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사무실에 도착하기 직전에 나의 내면에서 이러한 도전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너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느냐? 너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너는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너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느냐?’ 바로 이 순간 복음의 구원 문제가 너무나 놀라운 방식으로 내 마음에 펼쳐져 왔다. (중략) 나는 내 자신이 급속히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중얼거렸다. ‘나는 기도할 수 없어. 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죽어 있어. 그리고 기도하려 들지를 않아.’ 나는 숲을 떠나기 전에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했던 나 자신을 꾸짖었다. 애를 썼으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었다. 나의 내적 영혼은 완강하게 뒤로 물러서서 내 마음을 떠나 하나님께 가려 하지를 않았다. 나는 이미 때가 늦어서 하나님께서 포기하셨고 소망도 지나가 버렸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중략) 순간 성경의 이 구절이 번갯불처럼 내 마음에 스쳐가는 것 같았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중략) 그 때 그분은 나에게 다른 많은 약속들을 주셨는데 신구약성경으로부터,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아주 귀한 몇몇 약속들을 주셨다. 그 약속들이 얼마나 귀하고 신실했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그것들을 정확 무오한 진리,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주장으로 하나하나 받아들였다. 그것들은 나의 지성보다는 마음에 부딪혀 오는 것 같았다.(중략) 그렇게 하는 중에 내 마음은 너무나 충만해져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길을 향해 가볍게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가 과연 회심했는가 하는 의심은 거의 없었고 단지 나무숲 사이를 걸어가면서 ‘만약 내가 회심했다면 나는 복음을 전하리라.’ 하고 말한 기억이 난다. (중략) 그날은 (1821년) 10월 10일이었고 날씨가 아주 좋았었다.” [찰스 피니, 챨스 피니의 자서전, 생명의 말씀사, p.14~18]

D. L. 무디
“1855년 4월 21일, 무디가 나가고 있는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 한 분이 무디를 찾아 양화점으로 왔습니다. 무디는 그 때, 가게 뒷방에서 주문 받은 물건을 포장하고 있었습니다. (중략) ‘무디, 자네가 우리 교회에 출석한 지 1년이 되었지?’ ‘그렇지요, 1년이죠.’ ‘그러면, 자네는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체험이 있는가?’ 킴볼 선생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글쎄요. 언제나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는데요. 나의 어머니도 고향에서 열렬히 교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어렸을 적부터 에베렐 목사님의 설교도 듣고 주일엔 교회에 꼭 다녔지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무디 자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인 적이 있느냐는 거야. 즉 거듭남의 체험이 있었는가 말이야?’ ‘글쎄요. 아마 그런 경험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오히려 그런 것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한 것 같아요. 저도 기독교라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깊이 빠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중략) ‘무디, 하나님은 자네를 사랑하고 계시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무디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네.’
(중략) 킴볼 선생은 호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종이 한 장에 정성들여 쓴 것을 무디 앞에 내밀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것은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이었습니다. ‘자, 지금이 바로 그 때야! 그렇게 하겠는가, 무디?’
(중략) 마침내 무디와 킴볼 씨는 양화점 뒷방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디는 무릎 사이에다 머리를 깊이 묻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며 죄 사함 받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옆자리의 포장된 물건들처럼 딱딱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굳어 있었습니다. 퀴퀴한 가죽 냄새를 맡으며 죄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신성한 것에 대해서, 그들은 다시 성령에 이끌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2000년 전,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내렸던 성령의 역사가 여기 홀튼 양화점 창고, 가죽을 쌓아 둔 헛간에 강하게 임한 것입니다.
(중략) 반시간 전만 해도 생명이 없는 구두에 관한 대화로 시작된 그들의 만남이 마침내 한 생명에게 성령의 역사가 임하게 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구두를 사거나 팔지도 않은 그들은 가장 귀한 것을 사고 판 셈이 되었습니다.”[윌리엄 무디, <위대한 전도자 무디>, 은혜출판사, p.83~88]

존 웨슬리는 구원의 확신을 얻은 날과 시간, 장소를 모두 특정하고 있다. 찰스 웨슬리, 스펄전, 피니, 무디 모두 회심의 날짜를 기억하고 그것을 기록에 남겼다. 어거스틴, 죤 뉴턴은 날짜까지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회심이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이루어졌음은 인용한 기록들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구원파는 성경과 찬송, 복음주의자들의 간증, 그리고 우리들 스스로의 경험에 의거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는 날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성교단에서 비방하는 것과 같이 거듭난 날짜와 시간, 장소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 권신찬 목사는 아주 분명히 밝혀 놓은 바 있다.

단행본 <종교에서 해방>, p.73
“당신은 모태에서 출생했으므로 생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일을 잊어버리고 넘기는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거듭난 그 날짜를 잊어버린다 해도 그 날은 꼭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 성경 강연에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경험을 말하고 있다.

2000년 2월 12일, 로마서 강연(1회)
여러분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성경 말씀대로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롬 1:7) 한 것처럼, 여러분들이 광주든지 뭐 대전이든지 대구든지 수원이든지 어디서 복음을 알았든지 그곳은 하나님 앞에 진짜 감사할 자리입니다. 우리가 아는 이 복음은 절대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아는 이 복음은 확실히 믿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믿어진 것 대강 알 것입니다. 날짜는 혹 잊어 버렸을 지라도, 몰랐을 지라도. ‘살아오는 동안 언제 믿어졌는지?’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어디 살 때 믿어졌다 하는 것은 대강 알 것입니다.

2001년 6월 30일, 복음서 강연(24회)
이것은 좁은 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겪은 간증 속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고, 또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 가사 속에도 그들의 간증을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확실히 믿었다는 사람들 간증 속에 내 어느 날인지, 성경을 읽다가, 날짜는 기억 못해도,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고, 나를 의롭다 하심을 위해 살아나셨다”는 이 복음을 들었을 때 그윽히 마음에 평안이 왔다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지난 죄는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마음속에 그러한 희미한 것이 다 사라져 버리는 그 순간이 자기에게 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내 고통과 바꾼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 고민과 바뀐 것입니다.